☑️ Untitled, 1999
찢어진 캔버스라는 물체 자체는 루치오 폰타나가 앞서 보여준 공간주의의 시초와 비슷하게 보여진다. 하지만 찢겨진 캔버스 자체가 z자로 되어있다는 점이 큰 차이점으로 보인다.
루치오 폰타나는 캔버스라는 공간을 찢음으로써 그 너머의 공간에 주목하였고, 이는 여러 의미로 기존 캔버스나 전통적인 유화 양상의 예술계를 타파하려는 진취적인 한 걸음이었다.
그러나 마우리치오 카텔란이 1946년의 공간주의를 다시금 강조하려는 건 아니라고 보여지는 이유는, 이 작품은 찢어지고 난 이후의 공간을 강조하기보다는 마치 조로가 의적 행동을 마친 후 자신의 마크를 남긴 듯한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작품의 주제로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제를 종종 차용해왔는데, 이는 가식과 허황으로 가득한 예술계를 한 방 먹이는 조로와도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로의 표식=카텔란의 작품이 어느 정도 동일선상에 있다고 생각되게 되며, 어쩌면 루치오 폰타나를 생각나게끔 의도하여 그의 작품에 대한 오마주이자 동시에 구시대 관념에 대한 도전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은 전시회장을 들어간 후 곧바로 만나볼 수 있도록 큐레이팅 되었다. 마치 ‘앞으로 이 전시에서 보게 될 카텔란의 다른 작품들이 또 다른 조로: 카텔란의 마크일 것이다’라는 암시를 주듯.
☑️ Untitled, 2000
리움미술관에 전시되어있는 작품의 사진은 좌측, 예술품 거래 사이트인 아트시에 작품 정보로서 등록되어있는 사진은 우측이다. 이처럼 작품은 벽+조각으로 구성되어있지 않고 조각 자체만이 작품으로서 통용되고있는데 신기하게도 벽 혹은 해당 작품이 걸려있는 공간의 분위기만으로도 작품의 내용이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을 것 같아 놀라웠다. 만약 이 작품이 갤러리가 아닌, 장례식장에 걸려있었다면 또다른 의미를 내포하게 되지 않았을까..
리움미술관 작품설명 페이지들을 뒤져보다가 전시되지 않은 작품이 있다는걸 알게되었다.
Charile, 2003라는 작품은 세발자전거를 타고있는 어린이 몸의 카텔란 얼굴을 한 키네틱 조각이다. 작품은 안에 장착된 모터를 통해 마치 어린 아이가 갤러리를 세발자전거로 이리저리 종횡무진하는 상황을 연출하는데, 어른이 나서서 멈추게 해야할 듯한 위험천만한 긴장감과 동시에 어쩌면 정적이고 자본에 점철되어있는 예술계(갤러리)를 누구 하나 의식하지 않고 마음대로 휘젓는 악동(카텔란)을 보며 대리만족감을 선사시켜주는 작품이다.
갑자기 이 스킵된 작품을 거론하는 이유는, 만약 이 작품이 전시되어있었더라면 벽에 걸려있는 아이와 자유롭게 전시장을 누비는 아이가 상반되어 더더욱 작가의 메세지가 부각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작품의 가치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상상처럼 큐레이팅 할 수 없음은 이해하지만, 위 첨부된 사진처럼 작품이 전시되었다해도 저런 식으로 관객과 거리가 있는 상태에서 전시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관객과 작품이 유리벽으로 나뉘어있는 것이 작가가 의도한 부분인지는 모르겠으나, 공간과 개념을 뛰넘은 자유를 말하고자 하는 작품이 무언가에 의해 가로막히고, 메세지가 도달되어야 하는 이들이 참여가 아닌 먼 발치에서 지켜만 보는 것은 확실히 모순되어있다고 생각된다.
다시 벽에 걸린 어린이로 돌아오자면, 이 작품이 걸려진 위치는 전시공간중 가장 넓은 광장 역할을 하는 곳 초입부에 걸려있는데, 마치 위의 찰리가 마음대로 뛰놀다가 어른에게 잡혀 임시방편으로 얌전케하고자 벽에 걸어둔듯한 느낌을 준다. 엄청난 에너지를 내뿜는 아이를 단 하나의 벽걸이 핀으로 걸어둔다는 행위도 역설적이고 보는 이를 불안케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 Mother, 1999
이 작품을 본 순간, 이 작품만큼은 소장하고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지런히 모은 두 손, 모래속에 파뭍힌 살아있는 사람의 손을 처음 봤을 때 굉장히 폭력적인 사건의 아카이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품의 배경설명을 읽어보니 이는 예술행사장에 초청된 종교 방랑수행자의 퍼포먼스를 사진으로 기록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예술과 종교수행을 결합한 작가는 종종 있어왔지만, 종교수행을 이렇게 파격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대중에게 알린 것은 신선한 것이었다. 충격적인 비주얼을 통해서 카텔란은 무얼 말하고 싶었던 걸까? 알기 쉬운 형상이지만 보는 이가 생각해야하는 주제는 결코 단정짓기 어려운 주제를 삼는 카텔란의 노티함naughty함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 Him, 2001
전시장 한 켠 깊숙한 곳에 벽을 보고 무릎을 꿇은 소년이 있다. 소년은 마치 조용한 곳에서 벌을 받는 듯 하다. 앞에서 작품의 얼굴을 확인하니, 아뿔사. 세계사의 볼드모트와 같은 존재인 ‘그 Him’이다. 해당 작품은 큐레이팅이 작품의 메세지를 극대화하는데 한 몫 했다고 생각한다. 해당 작품을 보기 위해 가장 넓은 공간에서 안쪽으로 이어진 다양한 작품을 거친 후에서야 작품의 뒷모습을 볼 수있게 설계되어있는데, 먼 동선을 거쳐 작품의 앞모습을 봤을 때 충격은 극대화된다. 또한 작품은 어떠한 벽이나 선으로 감상에 있어서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제한이 없어서 원한다면 아주 가까이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물론 근처에 뮤지엄 어시트턴트분이 상주해 계시긴 하다)
유럽인에게, 나아가 전 세계인에게 히틀러가 주는 역사적 의미는 분명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들이다.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그를, 요세프 보이스의 펠트 양복을 입은 어린아이로 탈바꿈시킨 것은 많은 이들에게 있어서 생각의 기폭제 역할을 할 것이다.
잠깐 요세프 보이스의 펠트 양복 이야기를 하자면, 1921년 출생의 독일의 예술가인 그는 대부분의 당시 청년들이 그랬듯 나치에 입단하고 통신병으로 군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복무중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인하여 크림 반도의 어느 곳에 불시착하게 된다. 거의 목숨을 잃어가던 그에게 크림 반도의 원주민인 타타르족은 그의 상처에 지방같은 것을 문질러 펠트천으로 그를 치유해주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요세프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극적으로 바뀌었고, 독일로 돌아온 그는 미술을 공부하게 된다.
그가 만든 작품인 Felt Suit, 1970에서 해당 경험이 반영되어있다. 조난 상황에서 타타르족이 베풀어준 지방이 그의 상처를 따뜻하게 보호해주었고, 펠트가 추위를 막아주었기에 그에게 있어서 펠트는 외부에서의 무언가를 지켜주는 물체였다. 그런 펠트를 양복의 형식으로 만든 보이스는 현대인들의 소통 부재 등 여러 문제를 꼬집고자 하였다.
이런 ‘소통의 부재’, ‘보호’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펠트 수트를 입은 어린이는 사회적으로 어떤 메세지를 내포하고 있을까? 더군다나 그 아이가 히틀러라면? 위험한 상상과 추측을 관람객들에게 넘긴 채 조각은 묵묵히 벽만을 바라보고 있다.
☑️ Taxidermied Animals
카텔란전을 감상하다보면 그는 박제된 동물들로 많은 조각을 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제는 사체의 가죽을 이미 제작된 마네킹같은 조각에 덧씌워서 제작되기 때문에 극사실적인 카텔란의 작품 표현 방식에 적합하다. 하지만 단순히 사실같다는 것 뿐만 아니라, 한때 실제 생물이었던 것이 죽음 이후에 작품으로서 전시회장에서 관객들과 조우한다는 것이 큰 메세지를 준다고 생각한다.
그는 동물들의 죽음으로 살아있는듯한 연출과 표현을 보여준다. 그러나 각각의 박제된 동물들은 여러 메세지를 추가적으로 내포하여 ‘박제된 죽은 동물’이라는 강력한 메세지를 약간은 중화시켜준다.
전시회장 곳곳에는 숨겨져있는 박제된 비둘기 조각들이 있다. 바닥에도 있거니와 잘 보이지 않는 창틀 등, 마치 실제 사회에서 어디에서든지 우리를 지켜보는 귀신과도 같은 존재라고 생각이 든다. 하여 카텔란도 해당 작품의 이름을 관광객, 타인, 유령, 어린이 등 상당히 낮선 존재들의 단어로 작품을 명명하여 어디에나 있지만, 찾으고자 하면 없는 그런 사회의 존재(혹은 문제와 개념)을 말하고자 한다.
걸려있는 박제된 말을 전시한 Novecento, 1997은 존재 자체만으로 전시장 자체를 마치 죽음이 넘치는 도살장으로 변모시킨듯한 느낌이 든다. 거대한 작품이 위에서 단 한 개의 줄로 유지되어 메달려있는데, 그 아래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다니는 관람객들과 함께 공간이 어우러져 더더욱 잔혹하고 역설적으로 보인다. 자연으로부터의 축복받은 근육으로 초원을 질주해야 할 말은 죽음을 경험한 듯 축 다리가 늘어져 전시장에 대롱대롱 메달려있다. 또한 말에 여러 구속품이 끼워져 있는 것을 보아 야생마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길들여진 말을 가두는 억압 그리고 떨어질듯한 불안감.. 이는 어쩌면 현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 Untitled, 2001
이 작품은 어떻게 거래하나… 가 제일 첫번째 떠오른 생각이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집이나 소장 창고에 얌전히 소장되어있길 거부한다. 이 작품은 공공의 장소에 난입해야만 비로소 그 존재 의의가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다.
처음 이 작품이 전시된 공간은 고미술들이 즐비한 전시회장이었다고 한다. 마치 작품을 어설프게 훔치려는듯, 혹은 이런 고급이고 사교적인 공간에 어울리지 않은 불청객이 방문한 듯한 메세지를 주는 작품이었다.
난입은 언제나 불편하다. 사회의 질서에 맞지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새로운 무언가를 위해 추가적인 사고를 거쳐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뇌로서는 즐겁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들이다. 작가는 예술작품과 예술계에 난입하려고 하고있다. 간단한 문제를 무시하거나 간단히 생각해선 안되듯, 기존의 흐름을 깸으로서 새롭게 생겨나는 것들을 관객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 Shadow, 2023
충격적인 비주얼에 앞서 우선적으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이 작품은 2023년에 제작된 아주 최근의 작품이란 것이고, 냉장고속 인물은 약 35년전 돌아가신 카텔란의 어머니란 점이다.
본래 이 작품의 전신이 되는 작품은 1999년 제작된 Betsy라는 작품인데, 이 작품은 제작 당시 개인 아트컬렉터를 위하여 제작된 것이었다. 카텔란은 냉장고 안에 수집가의 할머니 모형을 배치하였는데, 이번 작품에선 비슷한 구도로 자신의 어머니를 배치했다는 점이 크다.
☑️ Untitled, 2003
일정시간마다 높은 곳에 앉아있는 아이가 드럼을 친다. 드럼소리는 꽤나 커서 1-2층의 모든 관객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이다. 아이가 드럼을 칠 때 관객들은 다들 작품을 보며 사진을 찍지만, 드럼을 치지 않을 땐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마치 어른들의 이야기 사이에서 지루해진 아이가 관심을 필요로 하듯, 카텔란의 전시를 작품으로서 진중하게 다가가려는 이들을 본래의 작품 목적에 맞도록 계속해서 디스트렉션을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 봤을 때, 누구에게나 가끔씩 올라오는 노티한 생각을 작품으로 형상화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 Comedian, 2019
그 유명한 작품, 코미디언이다. 누군가는 별 볼 일 없는 초라한 작품의 외형에 헛웃음을, 누군가는 전시된 바나나를 주기적으로 교체한다는 사실을 듯고 박장대소를 한다는 면에서 이 작품은 코미디언이 맞는 것 같다. 너무나도 유명한 작품이자 사건인 코미디언은 예술계에 있어서 너무나도 담대한, 그리고 심플한 도전이었다. 뱅크시의 작품 훼손은 마치 개인이 부린 마법같았다고 한다면, 코미디언은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이룬 만담과도 같았다. 이 작품을 전시한 카텔란, 120,000달러에 구매한 수집가, 그리고 이걸 떼어먹은 행위예술가, 마지막으로 바나나가 썩자 교체하고 결국 인파에 의해 부스를 종료한 갤러리까지. 해당 사건은 한 마디로 개판이었다. 하지만 예술계가 얼마나 정신나갔고, 어떻게 정신이 더 나가야하는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개판이었다.
개인의 생각이지만, 이 작품을 보고 메세지를 해석하려는 이가 더이상 없었으면 한다.
👏 Overall…
반대의 개념을 극적인 메세지로 변화시켜, 실체의 것을 활용하여 풀어낸 작품세계였다. 작품은 당혹스럽거나 해학적이지만 내포하는 의도와 메세지는 결코 간단히 넘길 수 없는 것들이다. 독일 유학 시절, 독일어 선생님이 요즘 세상에 대한 말이 다시금 생각나는 전시였다.
Komplizierte Probleme sollten kompliziert behandelt werden.
복잡한 문제는 간단히 다뤄져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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