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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og/💔 공황장애 그리고 퇴사

공황장애 그리고 퇴사 #2

누군가가 내게 '당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밝은 사람인가요?'라고 질문했을 때, 나는 '아니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대학생시절 고립된 유학경험과, 우울증에 대한 깊은 고찰로 인해 삶의 부조리함에 대해서 자주 고민하곤 했다. 여기에 코로나로 인해 예기치 못하게 귀국한 경험을 통해 삶의 여러 문제에 대해 고민한 기간이 길었다. 하지만 결코 이러한 경험들이 나의 업무태도에 영향을 미친 적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2020년 코로나로 인해서 전 세계가 비상이었을 때, 나는 독일에 있었다. 독일에서 더 이상 생활을 유지할 수 없겠다고 판단하여 한국으로 돌아왔고, 한국에 있는 동안 독일의 대학교에 입학시험을 통과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입학을 최대 3년까지 유예할 수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생활비를 충당할 목적으로 한 게임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비록 일본어 번역 알바로 입사하게 되었지만, 나를 좋게 평가해 준 대표와 동료들 덕분에 곧바로 알바 -> 계약직 -> 정직원으로 계약을 계속해서 바꿔나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일본어 번역 업무를 포함해 영어 번역, 문의, 디자인 등 여러 업무를 병행하게 되었다. 물론 매일 야근을 하느라 힘들었지만, 흔히 말하는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이' 였던 나는 어떠한 일이던 마다하지 않고 해내갔다.

 

자신의 다재다능함을 '근본없다, 전문성이 없다'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던 나였다. 이러한 다양한 일들을 척척 해낼 수 있던 경험은 너무나도 뿌듯했고, 회사는 이내 나의 모든 가치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1년간 미친 듯이 일을 하며 회사를 키우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대표는 사수와 나에게 마케팅을 전문적으로 맡으라고 했다. 마케팅을 전혀 모르던 나였지만, 사수의 도움과 인터넷 서치로 어떻게든 마케팅 업무를 처리해 나갔다.

 

당시에는 나 이외에 업무를 처리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회사가 작았기 때문에 큰 책임감이 늘 뒤따랐다. 빡빡한 일정 안에서 번역과 디자인, 데이터까지 다루어야 했던 나는 서서히 삐꺽 대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러한 삐걱임을 업무 수용도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마케팅 책을 구매해서 읽어보았고, 어떻게 하면 커리어를 발전시키면서 지금 하고 있는 업무를 고도화할지 고민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리고 2021년 여름, 우리는 라이엇 게임즈의 전략적 팀 전투와 닮은 게임을 출시하였고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도) 큰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지금처럼 마케팅 데이터에 대하여 깊은 분석이 이루어지지 못 한 오합지졸의 마케팅팀이었던 나와 사수는 대표에게서 큰 비난을 받았다. 게임은 문제가 없는데 마케팅이 잘 못했기 때문에 게임의 성적이 저조했다는 발언이 오고 가는 회의시간은 너무나도 끔찍한 시간이었다. 당시 회의준비를 하면서 '이번엔 또 어떤 소리를 들을까'하고 걱정이 컸을 정도였다. '마케팅팀에 그 누구도 마케팅을 해 본 사람이 없는데, 우리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이지?' 하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다. 대표는 저조한 게임 성과의 비난 대상을 찾기 위해 날카로운 말을 던져댔다. 그리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발언을 하는 도중에 나는 긴장감에 종종 말을 더듬거나 실수를 하게 되었다. 실수를 할 때마다 돌아오는 원초적인 비난과 한숨은 점차 나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사직이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 회사는 나에게 있어서 입학조차 포기한 회사였다. 나의 인생의 모든 가치관은 회사와 업무였고, 열심히 일한 만큼 회사가 계속해서 성장해나가는 걸 보니 매우 뿌듯했다. 그렇게 내 인생을 바치고자 마음먹은 회사였고, 그만큼 회사도 나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내게 퇴사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선택지였다.

 

대표로부터의 압박도 있었지만, 회사에서의 인정이 곧 나의 존재가치였던 당시의 나는 게임의 저조한 성적 문제 해결을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노력했다. 회사에서 아무도 하지 못하는 업무인 이미지 광고를 며칠 밤새워가며 몇백 장 제작했다. 당연히 혼자 하기엔 너무나도 벅찬 양이고, 촉박한 시간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완성시켰다.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이 소재들을 활용해 마케팅 캠페인을 집행하면서 본 업무 또한 틈틈이 진행했다. 하지만 떠안듯이 맡아버린 수많은 업무들이 나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일이 너무 많아서 하루에 11-13시간씩 일했다. 몸이 망가지는 것은 물론이었고,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아 오늘 이 업무를 끝내지 못하면 큰일 난다'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어느 여름날, 여느 때처럼 출근 지하철을 탔다. 그런데 갑자기 어지럼증과 구토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숨이 안 쉬어지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의 심장소리가 고막을 뚫을 듯 크게 들렸고,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었다. 간신히 내려서 역 벤치에 앉은 나는 남의 시선을 신경 쓸 겨를 없이 쓰러졌다. 수 초간 정신을 잃고 다시 일어나긴 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가 병원에 가고 싶었지만, 오늘까지 끝내야 하는 업무가 있었다. 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간신히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무실에 도착한 후 컴퓨터를 켜고, 몰려오는 구토감을 참으며 업무를 진행했다. 중간에 화장실에 달려가서 토를 몇 번이고 했다. 이를 본 아트팀장이 자신의 몸은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고 말해줬다. 그는 내게 택시 타고 퇴근하라면서 법인카드를 건네주었다. 급한 업무를 일단 마친 나는 카드를 받아 들고 근처 내과로 향했다.

 

내과에서 진찰을 받아본 결과, 큰 이상은 없으니 이비인후과로 가보라고 권유받았다. 권고받은 대로 이비인후과에서 검사를 받아보았으나, 코로나일 수도 있다고 하여 근처에서 PCR검사도 받았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까지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과 구토감이 멈추지 않았다. 약간의 인터넷 검색을 해 본 결과 공황발작과 반응이 똑같았던 나는 정신과병원을 찾아가게 되었다.

 

공황발작 증상이네요.

정신과 선생님이 내게 말해주었다. 인터넷에서 어느 정도 찾아보고 간지라 큰 충격은 없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정신질환을 의사에게서 진단받은 것은 처음이었어서 기분은 뒤숭숭했다. 회사에 조퇴를 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공황장애가 적힌 진단서를 제출했다. 이를 본 회사는 내게 휴직을 권유했다. 하지만 업무가 많이 밀려있었고, 업무처리=존재의의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나는 한 달 동안 재택근무하기로 협의를 보았다.

 

한 달간의 재택근무동안 나는 밖에 전혀 나가질 못했다. 밖에 나가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위기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외부에 대해 두려움이 컸었다. 재택근무가 저조한 게임 성과에 도움이 되진 못했지만, 어느 정도 나의 공황 증세를 진정시킬 수는 있었다.

 

재택근무가 끝나고, 한 달 만에 밖으로 나와 출근길을 걸었다. 갑자기 무릎과 다리가 아파왔다. 나는 걸을 때 무릎이 아플 정도로 근육이 퇴화되어 있었다. 그런 나의 몸의 변화에 놀란 것도 잠시, 지하철을 타자니 또다시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지하철을 타면 죽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근무 첫날, 회사까지 따릉이를 타고 출퇴근하기로 했다.

 

이후 몇 번이고 지하철을 타려고 노력했으나,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후 약 3개월 동안 따릉이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게 되던 시기, 날씨 때문에 더 이상 따릉이로 출퇴근하는 건 힘들다고 판단한 나는 회사 근처로 이사하기로 했다. 걸어서 출퇴근할 수 있는 거리였던지라 곧바로 이사했고, 그 이후로 대중교통을 약 1년간 타지 않게 되었다.